PHASE 6 9장
파열 직전의 테이블 (3)
레스토랑 '지층', 밤 9시 10분
테이블이 깨끗하다.
잔만 두 개 남아 있다.
와인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다.
유리잔 바깥쪽에
붉은 자국이 얇게 남아 있다.
페리클레스는
말하지 않는다.
1초.
2초.
그 침묵이 길어지면서
공기가 조금 더 조여든다.
아스파시아는 잔을 만지작거린다.
손가락 끝이 잔 아래를 천천히 돈다.
유리의 차가움이 피부에 닿는다.
맥박이 손끝으로 내려온다.
'말할 거야.'
그 생각이 들자마자
심장이 한 박자 빨라진다.
예상은 늘 그렇다.
도망칠 수 없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페리클레스가 입을 연다.
"아스파시아."
이름을 부르는 톤이 달라진다.
평소처럼 부드럽지 않다.
더 낮다.
더 또렷하다.
아스파시아의 손가락이 멈춘다.
잔의 가장자리를 누르던 힘이
아주 미세하게 세진다.
"요즘 제 삶이요."
페리클레스의 목소리는 고요하다.
"처음으로 전부 말이 돼요."
아스파시아는 그를 본다.
그의 눈에는 흥분이 없다.
확신만 있다.
"유튜브가 왜 잘 됐는지.
강연에서 왜 그 말이 나왔는지.
책이 왜 그 제목이어야 했는지."
그는 테이블 위 자기 손을 본다.
손가락이 가지런히 모여 있다.
흔들림이 없다.
"전부 연결이 돼요."
아스파시아의
숨이 조금 얕아진다.
연결.
그 단어는 늘 함정이다.
"…그래요?"
"네."
그는 이제 그녀를 본다.
피하지 않는다.
"당신이 있어서요."
아스파시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눈동자만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또.'
'이 사람은 나를.'
'증거로 쓰고 있어.'
그녀의 갈비뼈 안쪽이
다시 단단해진다.
이건 고백이 아니다.
이건 자기에 취한 자의
자기 선언이다.
그는 자신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완성의 근거를
그녀 위에 올려놓는다.
허락 없이.
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아직.
입술은 고요하다.
눈빛만 차갑게 식는다.
페리클레스는 말을 멈춘다.
잠깐 창밖을 본다.
그는 다시 그녀를 본다.
아스파시아는
그 표정을 안다.
그가 촬영 전에 짓는 표정.
촬영 직전.
강연 시작 직전.
자신의 서사를
확신한 사람의 표정.
이제 나온다.
페리클레스가 움직인다.
재킷 안주머니로 손이 간다.
아스파시아는 그 손을 본다.
시선이 따라간다.
천천히.
그는 작은 케이스를 꺼낸다.
검은색.
무광.
탁.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3초.
시간이 늘어진다.
또 3초.
몸 안쪽이
아주 조용해진다.
심장이 멈춘 것처럼.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닫힌다.
딸깍.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나는 진심이에요."
페리클레스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결론을 통보하는 톤.
"당신과."
한 박자의 여유.
그 박자가 더 길게 느껴진다.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침묵.
레스토랑의 소음이 멀어진다.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 웃는 소리.
모두 배경으로 밀려난다.
이 테이블 위만
진공처럼 조용하다.
아스파시아는
케이스를 보지 않는다.
페리클레스를 본다.
그의 눈.
두려움이 없다.
망설임이 없다.
자기 서사의
마지막 문장을 말한
사람의 눈.
‘과거.’
기억이 짧게 번쩍인다.
수정 언니.
“지적인 매력은 안 먹혀.”
김교수.
“계산 안 한 호의는
나중에 청구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
십 년.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지고.
혼자 무너지고, 다시 서고.
'이건.'
아스파시아는 생각한다.
'이건 나한테
선택지를 주는 말이 아니야.'
그는 이미 결론을 냈다.
그리고 그 결론 안에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두었다.
비워두지 않았다.
진심이다.
선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그 위험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녀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공격성을
천천히 깨우는 종류였다.
페리클레스는 기다린다.
조급하지 않다.
그의 세계에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아스파시아는 잔을 든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잔을 내려놓는다.
컵의 유리 바닥이
작은 소리를 내며
나무 테이블에 닿는다.
그리고 아주 차분하게
그를 본다.
"…그 말."
"되게 무겁네요."
페리클레스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바뀐다.
"무거워요?"
"네."
"…왜요?"
아스파시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이 길어진다.
케이스는 여전히 닫혀 있다.
그는 그것을 열지 않는다.
그녀가 먼저 반응하길 기다린다.
아스파시아는 그를 본다.
그의 얼굴.
안정되어 있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 깨닫는다.
이 사람은
내가 무겁다고 해도
거절로 듣지 않는구나.
그 확신이.
그 단단함이.
그녀의 선택을
흡수해버릴 것 같은
그 확신이.
잠깐 그녀를 아찔하게 했다.
그리고 바로,
누가 누구를 기다리겠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번쩍인다.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무거워도 괜찮아요."
그는 케이스를
손가락으로 한 번 건드린다.
열지 않는다.
"당신이 받아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아스파시아는
그 말을 듣는다.
‘기다린다.’
몸 안쪽이
철컥 하고 더 강하게 닫힌다.
기다린다는 말은
이미 결론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는 포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유예를 말하고 있다.
그 유예 안에서 내 선택은
이미 계산된 변수에 불과하다.
나는
누군가의 결론을 완성하기 위해
배치되는 장기말이 아니다.
그가 기다린다고 말하는 순간,
결정권은 이미 그의 손에 있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아스파시아의 눈빛이 바뀐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느리게 이를 악물었다.
기다리는 쪽이
항상 약자인 건 아니다.
사냥감이 도망치지 않는다고 해서
잡힌 것은 아니다.
때로는
움직이지 않는 쪽이
먼저 물고 있다.
그는 기다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다림은
입을 벌린 채,
상대가 스스로 들어오길
기대하는 태도다.
아스파시아는
그 입 안쪽을 본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한다.
잘못 물면,
이빨이 먼저 부러진다.
그것이 누구의 것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INTO THE 6TH H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