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9장

 파열 직전의 테이블 (4)




레스토랑 '지층', 밤 9시 25분



"왜요?"



페리클레스의 목소리.

낮다.
흔들리지 않는다.


아스파시아는 그를 본다.



'왜요.'



이 질문이
거절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의 질문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안다.





"…준비라는 게."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구체적으로 뭔가요?"


"시간이요? 상황이요?

아니면..."



"저요?"



아스파시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페리클레스는 기다린다.



창밖.
가로수.
잎이 없다.
가지만 남았다.


"…전부요."


그녀가 말한다.




페리클레스는
그 말을 한 번 씹는다.


"전부."


"네."


그는 잔을 든다.
마시지 않는다.
다시 내려놓는다.


"아스파시아."


"저는 당신을 오래 봤어요."



아스파시아는 그를 본다.


"처음에 카페에서 만났을 때부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원하는지."
"뭘 무서워하는지."




아스파시아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천천히 쥐어진다.


"그래서 기다렸어요."


"서두르지 않으려고.
당신 속도에 맞추려고."





진심이다.
그가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오래 봤다는 사실은
위로보다는 위협에 가깝다.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은
언젠가 그걸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나는
그에게
너무 많이 보여줬나.




"근데 아스파시아."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준비가 안 됐다는 말이."



"저한테는."



잠시 침묵.



"당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말로 들려요."


더 긴 침묵.



아스파시아는
그 말이 심장 어딘가에 닿는 걸 느낀다.


닿았다.
그 말은 정확히 닿는다.

피부가 아니라,
더 안쪽에.




그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도망친 적이 있다.
좋아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의 말이
나를 움직였던 적도 있다.



하지만 내 움직임에 

방향과 목적을 정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나다.




"도망이요."



아스파시아가 말한다.





"저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서 있는 거예요."



페리클레스의 

척추가 곤두선다.



"제 자리에."


아스파시아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린다.



“도망이라고 단정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나를 이해했다고 믿는 거죠.”



"페리클레스."



"당신은 저를 오래 봤다고 했죠."



"네."



"그럼 알 거예요."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본다.



"제가 누군가의 철학 안에
편입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페리클레스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아스파시아는 계속한다.



"당신 책 제목이요."



"《진정한 사랑과 성장》."



"좋아요."



페리클레스는 듣는다.



"진짜로요.
당신이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요."



"…근데요?"



"근데."


아스파시아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가늘어진다.




"그 책 안에서."



한 박자.



"제가 어디 있어요?"



페리클레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

시작됐다고 했잖아요."




"기준이 저였다고."



"네."



"그러면."


아스파시아는 잔을 든다.
마시지 않는다.


“저는 당신 철학의 증명서예요?
아니면 사례 연구?”


침묵.


 길고
       무거운
침묵.



페리클레스는

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그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흔들린다.


아스파시아는 그 얼굴을 본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
자기가 틀렸다고는
여전히 생각하지 않는 얼굴.






"페리클레스."




아스파시아가 말한다.




"당신은 저를 사랑해요."



"…네."



"근데."



그녀는 잔을 내려놓는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방식이."



한 박자.



“저를 다루기 쉬운 자리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공기가 묵직해진다.


페리클레스의 눈빛이 변한다.
열리는 것 같다.
반박을 준비하는 얼굴.



"그게 뭐가 문제죠?"


"당신도
안정이 필요하잖아요."


"프로젝트도 중단됐고.
지금 힘든 거 나 알아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인 거예요?"



아스파시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진다.


페리클레스는 말을 멈춘다.



"제가 흔들릴 때."
난 일을 망쳐서 흔들렸어.




“제가 약해 보일 때.”
내가 약한 순간을

넌 정확히 봤지.


“그때 말하는 게.”
타이밍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항상 힘의 방향을 드러내.



"저한텐."
의도가 무엇이든.


“공격처럼 느껴져요.”
네 행동은

네가 유리한 위치 선정이었어.



칼이 천천히 들어간다.



“사랑이 아니라.”

위로가 아니라,


“확보.”
빈 자리를 사랑이라 부르고,

먼저 이름 붙이는 방식.






 공기가 바뀐다.

    
페리클레스는
처음으로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한다.



“…그건 아니에요.”


단호하지만,

처음으로 균열이 있다.


“저는 당신을

가지려는 게 아니에요.”



아스파시아는 미세하게 웃는다.
웃음 같지 않은 웃음.


“알아요.”



“근데.”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번뜩인다.


나는 흔들릴 수는 있어도,

 흔들리는 순간에

붙잡히는 사람은 아니야.



“저는 누가 제 목에
끈을 걸려고 하는 순간을
잘 알아요.”



조용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녀는 가방을 든다.
코트를 걸친다.



“진심은 고마워요.”



“이번에 고마웠어요.”



그리고 천천히 걸어 나간다.


케이스는 닫힌 채,
테이블 위에 남아 있다.


조명 아래
검은 상자가
혼자 놓여 있다.






[에필로그 — 각자의 밤]




페리클레스 서재,  밤 11시



책상 위에 원고가 펼쳐져 있다.

《진정한 사랑과 성장》
제목이 선명하다.



페리클레스는 앉아 있다.
펜을 들고 있지만 쓰진 않는다.

서랍 안.
작은 케이스.
여전히 닫혀 있다.


그는 창밖을 본다.
도시의 불빛.
고요하다.


‘왜.’



생각한다.



‘뭐가 잘못됐지.’



그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릴 수 있었다.
논리는 완벽했다.


그럼에도.
아스파시아는 나갔다.



그의 손이 잠깐 멈춘다.



‘…더 밀어붙여야 했나.’




그는 원고를 본다.
잠시.

그리고 처음으로
그 제목이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그 이유를 모른다.



아직.






아스파시아 집, 밤 11시 30분



불을 켜지 않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다.

정확하게.
가지런히.
거울 앞에 선다.

어둠 속,
자기 얼굴이 흐릿하게 떠 있다.
스카프를 푼다.

천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귀걸이를 뺀다.

하나.
둘.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작은 금속음.


그녀는 거울을 본다.
피곤하다.
눈 밑이 약간 어둡다.


하지만.
눈빛은 다르다.

오늘 밤,
무언가가 완전히 깨어났다.



‘진심이랑 소유는 공존이 가능하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걸 10년 전에 배웠다.’


하지만,

오늘 밤.
잠깐.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


“기다릴 수 있어요.”




그 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처음으로 떨리던.



그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바로,
가라앉는다.

연약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천천히 말한다.

낮게.
건조하게.




“이제.”


숨을 고른다.



“다시 움직여야지.”


불을 켜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만
또렷하게 살아 있다.





INTO THE 6TH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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