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9장
파열 직전의 테이블 (2)
페리클레스는 계속 말한다.
"제 철학이 생겼어요."
그의 목소리는 낮다.
흔들림이 없다.
아스파시아는
숨을 한 번 얕게 들이마신다.
생각해.
“감정으로서의 사랑 말고.”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른다.
하지만 망설이지는 않는다.
내가 처음에
이 남자한테 왜 접근했지?
기억이 짧게 스친다.
의문. 실험. 계산.
그녀는 듣는다.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힘으로서의 사랑."
그의 눈이 그녀에게 닿는다.
이번엔 피하지 않는다.
"그게 제가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한 박자 침묵.
"제가 경험한 거고요."
경험.
그 단어가 묘하게 피부를 스친다.
아스파시아의 손끝이
와인잔을 더 단단히 쥔다.
도대체 왜 내가 지금...
생각이 날카롭게 솟구친다.
이딴 개똥철학의...
소재나 되어야 하는 거지?
그는 웃는다.
자기 확신이 있는 얼굴.
이미 결론을 얻은 사람의 얼굴.
아스파시아는 웃지 않는다.
얼굴이 조금 굳는다.
착각도 도를 넘었네.
입술이 바르르 미세하게 떨린다.
이 사람은.
그녀의 시선이 그를 훑는다.
자기 철학 안에.
나를 넣어뒀어.
넣어두고,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너 따위가.
프로젝트 중단의 여진이
아직 몸 안에 남아 있다.
허기처럼.
열처럼.
그 흔들리는 몸으로
지금 이 사람의 안정된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그 안정에 기대면
잠깐은 덜 아플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 조심한다.
이건 트랩이다.
그녀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이미 자리가 만들어져 있는 트랩.
그의 사랑은
선의로 보이지만,
형태가 있다.
방향이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의 끝에는
그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네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그 사랑,
나한테는 녹슨 쥐덫일 뿐이야.
아스파시아의 심장이
한 번 더 세게 뛴다.
도망가고 싶은 충동과
부수고 싶은 충동이 동시에 올라온다.
그 충동은 하얗게
그녀의 머리속을 가득 채운다.
그녀는
자신의 현실의 입지와,
그의 입지를 비교하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
표정은 여전히 고요하다.
하지만 눈빛은
이제 조금 달라져 있다.
덫을 본 사냥꾼의 눈.
이 사냥터는 내 구역이다.
선을 넘은 건 너야.
그리고 나는
덫에 걸리는 쪽은 아니지.
접시가 온다.
하얀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너무 단정해서 오히려 인위적이다.
그녀는 이래서
파인 다이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공들여 쌓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이 태도를.
두 사람은 먹기 시작한다.
칼이 접시를 스친다.
포크가 죽은 동물의 살을 가른다.
대화는 계속된다.
날씨.
출판 일정.
서촌의 새 카페.
대화 속 문장들은 매끄럽다.
서로의 본심을 스치고,
그대로 미끄러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적절한 온도로 웃는다.
자연스럽다.
너무 자연스럽다.
하지만 몸 안쪽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용히
경계를 세운다.
갈비뼈 안쪽이 단단해진다.
배 아래가 차갑게 식는다.
보이지 않는 선이 하나 그어진다.
지금은 식사 중이니까,
아직은 웃어도 되니까,
그 선을 넘지 않는다.
그녀는 구두의 앞굽을
바닥에 찍듯이 누른다.
추락 직전,
가파른 선 위에 선 무용수의 발끝처럼.
레스토랑, 밤 9시
조명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테이블 위 그림자가 깊어졌다.
디저트 접시가 온다.
푸딩의 얇은 설탕막이
표면을 덮고 있다.
광택이 유리처럼 매끈하다.
아스파시아가 스푼을 든다.
살짝 누른다.
아주 작은 소리.
툭.
설탕막이 갈라진다.
그 미세한 파열음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린다.
페리클레스는 말을 멈춘다.
그는 그 소리를 듣는다.
눈이 잠깐,
그녀의 손끝에 머문다.
아스파시아는
푸딩의 부서진 표면을
천천히 떠서 입에 넣는다.
달다.
너무 달다.
디저트 접시가 치워진다.
포크도, 스푼도 사라진다.
테이블 위가 깨끗해진다.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
도망칠 소리도 없다.
페리클레스는
와인 잔을 내려놓는다.
잔 바닥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이상할 만큼 선명하다.
그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손가락이 가지런히 놓인다.
준비된 사람의 자세.
아스파시아는 몸으로 느낀다.
그의 눈빛이
이제 도망갈 구멍을
찾지 않는다는 걸.
아스파시아는
등을 의자에 기댄다.
턱을 아주 조금 들어 올린다.
그녀는 안다.
이제 시작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순간,
누가 먼저 삼켜질지도.
INTO THE 6TH H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