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9장
파열 직전의 테이블 (1)
강북 레스토랑 '지층', 저녁 7시 30분
창이 넓다.
유리 너머로 은행잎이
다 떨어진 가로수가 보인다.
실내 조명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테이블 위, 물잔 두 개.
와인잔은 아직 비어 있다.
페리클레스가 먼저 와 있었다.
아스파시아가 들어오는 걸 보고 일어선다.
"왔어요."
"네."
아스파시아가 자리에 앉는다.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건다.
스카프는 풀지 않는다.
웨이터가 온다.
"와인 리스트 드릴까요?"
페리클레스가
메뉴판을 펼치지 않고 말한다.
"부탁드린 걸로 준비해 주세요."
"네, 잠시만요."
아스파시아는 물잔을 든다.
한 모금 마신다.
'오늘 분위기가 다르다.'
페리클레스는
평소처럼 말이 많지 않다.
그게 이상하다.
그의 침묵은 보통
무언가를 꺼내기 전이거나
무언가를 참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참는 게 아니야.'
'저 사람.'
아스파시아는 생각한다.
'뭔가 넘어갔어.'
웨이터가 다시 다가온다.
손에는 슬림한 병 하나.
라벨이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난다.
Chambolle-Musigny
Premier Cru
웨이터가 병을 테이블 위에
잠시 내려놓는다.
“샹볼 뮈지니 프리미에 크뤼,
맞으십니까.”
페리클레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스파시아의 시선이
라벨에 잠깐 머문다.
그녀는 와인을 안다.
이 선택이 ‘하우스’가 아니라는 것도,
가볍게 고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웨이터가 코르크를 천천히 빼낸다.
마찰음이 아주 낮게 울린다.
잔에 와인이 채워지고,
짙은 붉은 빛이
잔 안에서 천천히 퍼진다.
은은한 조명의 빛이
섬세한 유리잔 가장자리에 맺힌다.
아스파시아는 잔을 들지 않는다.
그 색을 먼저 본다.
“향이 섬세하네요.”
페리클레스가 그녀를 본다.
“그래서 골랐어요.”
짧은 정적.
웨이터가 물러난다.
잔이 부딪히지 않는다.
각자 먼저 마신다.
페리클레스가 말을 꺼낸다.
“요즘 이상하게…
확신이 생겨요.”
아스파시아는
잔을 내려놓지 않는다.
“확신이요?”
그녀의 시선은 잔의 표면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
“제가 가는 방향이요.”
그는 잠깐 창밖을 본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본다.
“그리고 누구랑 가고 싶은지도.”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조인다.
‘반응하지 마.’
심장이 한 번, 크게 뛴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
“책 쓰고 있어요.”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올라온다.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말 안 했네요.”
그는 웃는다.
입술 끝만 올라간다.
“준비 다 되고 나서
말하고 싶었어요.”
아스파시아는
잔을 내려놓는다.
유리와 테이블이 맞닿는 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하다.
“어떤 책이에요?”
그는 잠깐 숨을 가다듬는다.
정확히 말하고 싶어서,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것에 대해.
“제목은요.”
아주 짧은 정적.
“《진정한 사랑과 성장》.”
아스파시아의 손이
와인잔을 쥔 채 그대로 멈춘다.
손등 위로 얇은 핏줄이 도드라진다.
“…직접적이네요.”
“네.”
그는 흔들림 없이
그녀를 본다.
“저한텐 자연스럽게 나온 제목이에요.”
아스파시아는 메뉴판을 편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출판사는요?”
“민음사요.”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봄에 나와요.”
왜,
내가 아니라 너지.
“잘 됐네요.”
말은 담담하다.
그녀의 맥박은 조금 더 빨라진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다.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상한 건요.”
“네?”
그는 이제 완전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 모든 흐름이.”
그는 잠깐 말을 멈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스카프 매듭에 닿는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 시작됐어요.”
아스파시아의 손이
스카프를 다시 만진다.
이번엔 아주 천천히,
매듭을 느슨하게 만든다.
풀지는 않는다.
"유튜브도, 강연도, 책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다.
"뭔가 말하려고 할 때마다
당신이 떠올랐어요."
그는 몸을 기울이던 것을 멈춘다.
하지만 시선이 거리를 줄인다.
"이 말이 맞나,
이 방향이 옳나,
이 감정이 진짜인가."
아스파시아의 심장이
한 박자 빨라진다.
"그 기준이 당신이었어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레스토랑 안의 소음이 한 겹 얇아진다.
진심이다.
그건 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스파시아는 물을 마신다.
목이 타지 않는데도.
물잔 가장자리에 닿은 입술이
아주 잠깐 멈춘다.
내가,
생각이 끊긴다.
왜 여기에 있지.
그리고 그보다
더 불편한 생각이 올라온다.
저 사람…
나와 지금
얼마나 벌어졌지.
그녀의 심장이
한 박자 더 빠르게 뛴다.
속이 조여든다.
섬세한 실크 패브릭이
목을 스치며 떨어진다.
목이 드러난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본다.
이번엔 피하지 않는다.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고요해진다.
'기분이 좋지 않다.'
불쾌에 가까운 흥분이
가슴 안쪽에서 서서히 퍼진다.
심장은 조이고,
맥박은 더 빨라진다.
그리고 얼굴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고요하다.
INTO THE 6TH H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