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8장

 가속의 시작 (4)






 커피 포트에

커피가 채워져 있다.

아직 따뜻하다.



 

 아스파시아는 핸드폰을 든다.



“잘 쉬었어요.

이제 정리하고 갈게요.”



 보내고 나서

잠시 창밖을 둘러본다.

 아침 햇살에 감싸여 있는 서울은 

아직 조용하다. 





진동이 울린다.

페리클레스의 전화.




 “…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다. 






 “벌써 가려고요?” 





“…네. 잘 쉬었어요.” 




 “그래요?”




잠깐 정적.





 “급해요?” 





 아스파시아는 말이 막힌다.




 “…아니요.” 





 “그럼 왜 나가요.”





 아스파시아는

창가로 걸어간다.



 “제 집이 있으니까요.”






 “프로젝트 정리

아직 끝난 거 아니죠.”




“…네.”




 “그럼 당분간 여기 있어요.” 







 “…네?”




“당분간이요.”




 톤은 부드럽다.

강요가 없다.




 “혼자 있는 것보다

나을 거예요.”



 그는 이어간다.



"일 정리하기엔

여기 환경이 더 좋아요.”


 “거의 안 마주쳐요.

저도 제 일 해야 해서.”






 아스파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볼게요.” 





 전화 너머에서 그가 웃는다. 





 “이미 반쯤 수락한 말투네요.” 




 아스파시아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아직은 아니에요.”




“알아요.”




 잠깐의 정적,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정리될 때까지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선이 그어진다.

 아스파시아는 방을 둘러본다.

 창. 식탁. 조용한 공간.




“이틀이면 충분할 거예요.”



 전화 너머.

 페리클레스의 짧은 숨이 들린다.





 “비밀번호 보내둘게요. 

필요한 건 편하게 쓰고.”



통화 종료. 



 아스파시아는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이틀.

이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틀은 충분히 짧고,

 충분히 길다.


 하지만— 

 판은 이미 기울어 있다.









아스파시아의 집 – 오후



아스파시아는

집으로 돌아왔다.


짧은 전자음.


문이 열리고,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툭.




 집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소리가 튄다.


아스파시아는

몇 걸음 옮기다

그대로 주저앉는다.


거실 바닥에 털썩.

 잠시, 완전한 정적.



 복부 한가운데로

 분노가 응결되어 꽉 뭉친다.



 차가운 것…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아이스크림.


 페리클레스의 아파트가 떠오른다.

 부족함 없어 보이던 동네.

 작품처럼 정돈된 야경.




 그때 움직임을 감지한 조명이

은은히 켜지고, 

냉장고 쪽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아스파시아는

벌떡 일어나 냉동실을 연다.

  플라스틱 얼음판이 반짝인다.


 얼음을 빼려는데— 

플라스틱 트레이가 단단히 붙어 있다.


 딱. 딱.


쾅.



 그녀는 얼음판을 내리치다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한다.






플라스틱이 울리고,

차가운 파편 같은 소리가 퍼진다.

얼음은 깨지지 않는다.


 손에 힘을 주는 대신,

그녀는 트레이를 내려놓는다.

김교수도 말했다.


큰 흐름을 거스르면,

손목만 아프다.


아스파시아는

냉동실 문을 닫는다.

 얼음을 포기하고 컵에 물을 따른다. 

그리고 원샷.




 그 앞에서,

 우는 거 싫었는데.

  

프로젝트 실패.

마이너스 통장.

 


백만 유튜버.


내가 어쩌자고

그에게 먼저 접근한 거지.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난다.






화장실로 향하다가

거울 앞에서 멈춘다.


붓기가 빠진 얼굴은

여전히 예쁘다.

피부는 빛을 받는다.


 하지만 눈빛은 달라졌다.


 어딘가,

단단히 굳어 있다.






 아스파시아는

오래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어깨를 때린다.

 처음엔 따갑고, 곧 익숙해진다.

 물이 너무 뜨거워

손을 뻗어 온도를 낮춘다.

 안 맞으면, 조율하면 된다.


 안 된 건 안 된 거고. 

 증기가 차오른다.

호흡이 천천히 맞춰진다.


 실패는 사고가 아니라

주파수 미스였을지도 모른다.

다시 맞추면 된다.





샤워를 끝내고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감고

거울 앞에 선다.


속눈썹 끝에 물기가 남아 있다. 

눈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연다.



 모든 걸 버릴 필요는 없다.

 쓸 수 있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나누면 된다.


 중단된 프로젝트 폴더.

파일명에 붙은 날짜들이

아직 살아 있다.


 삭제하지 않는다. 

 대신 새 폴더를 하나 만든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한다. 

 페리클레스.

 아스파시아는 바로 보지 않는다. 

노트북 화면을 먼저 닫는다.


잠시 가만히 숨을 쉰다.

 그리고 전화를 무시하고

다시 노트북 화면을 연다.





 띵.


 휴대폰 진동.

화면이 잠깐 번쩍인다.



[페리클레스]



노트북의 창을 하나 더 연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휴대폰을 바라본다.




보고 싶다. 내가 갈까? 





 아스파시아는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의 메시지를 보았을 때,

이 차가운 방의 온도가

미세하게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결국

답장을 쓰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

 불빛이 꺼진 어두운 방 안.


노트북 화면은

여전히 희미하게 켜져 있고,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다시 시작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다.


하지만 눈빛과 손끝에는

열기가 돌아와 있었다.








 다음날 아침,

페리클레스의 팀 오피스



 햇빛이 넓은 창으로 들어온다.


페리클레스는 정장을 입고 있다.

머리는 정돈되어 있고,

목소리는 또렷하다.



 그는 통화를 끊고 메시지를 하나 보낸다.



“어제 말 못한 게 있어요.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요?”




 그의 책상 위엔 회의 자료와

새로 합류한 사람들의 명단.

사람이 모이고 있다.




도움, 조언, 연결.


그는 이제 이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낸다.




아스파시아의 아파트 – 아침





 아스파시아는 메시지를 읽고

잠시 그대로 둔다.



괜찮아요, 도

좋아요, 도

아직 치지 않는다.




 대신, 냉장고를 연다. 

아무것도 없다.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차갑다.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그의 집에서는

항상 나를 위한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술. 담요. 아이스크림. 

 지금 이 집엔 그런 게 없다.




내 집인데.

나를 위한...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을 가볍게 한다.


 그녀는 답장을 쓴다.




“저녁 8시.

장소는 당신이 정해요.”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나를 덧붙인다.


“일이 있어서, 짧게 봐요.”






페리클레스의 오피스 – 오전





메시지를 읽은

페리클레스는 웃는다. 


 짧게 보자는 말이

그에겐 이렇게 들린다.




“그래도 보자는 거잖아.”




 그의 머릿속엔

이미 그림이 있다.

위로. 안정. 곁.


이 사람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흔들림을 받아낼 수 있다.


 그건 선의다.

그건 책임감이며,

사랑의 시작이다.


 그는 그렇게 믿는다.







아스파시아의 아파트 – 오후



아스파시아는 옷을 고른다. 

최대한 라인이 드러나지 않게,

헐렁한 니트에 슬랙스.


 이 만남이 무엇으로 이어질지

이미 어렴풋이 안다.




 그는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은 분명,

이득을 건넨다.


 그녀는 숨을 내쉰다.





“그래도…”



“…이건 내 길에 없는 장면이야.”



 아직 확신은 하지 않는다.


오늘은 확인만 한다.

 그 정도는,

아직 가능하니까.



INTO THE 6TH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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