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8장
가속의 시작 (3)
현관문이 열리자
불이 자동으로 켜진다.
넓은 창.
서울의 야경.
페리클레스가
그녀의 등에 한 손을 댄다.
"코트 걸어줄게요."
페리클레스가 그녀의 코트를 받아
천천히 걸어 옷걸이에 건다.
"앉아요."
"네."
그녀가 소파에 앉는다.
가죽이 천천히 눌린다.
이전에 이 소파에 앉아
각자의 미래를 꿈꿨다.
그는 편집을 하거나 대본을 썼고,
그때 그녀가
열중하던 프로젝트는
더 이상 없다.
페리클레스는 부엌으로 간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
얼음 소리.
아스파시아는 창밖을 본다.
남산타워의 붉은 점,
한강 위에 길게 번지는 빛.
한숨같은 다리 위 차들의 궤적.
글렌피딕 21년과 함께
그가 돌아온다.
"여기."
페리클레스가 잔을 건넨다.
"고마워요."
그는 잔을 건네고
그녀 옆이 아닌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거리 약 50cm.
“건배.”
“…뭐에?”
"오늘이 끝난다는 것에."
아스파시아는 미소 짓는다.
씁쓸한 미소.
잔이 부딪친다.
대화가 이어진다.
아스파시아가 말한다.
손으로 잔을 계속 돌린다.
페리클레스는 끊지 않는다.
고개만 가끔 끄덕인다.
잔이 비면
말없이 다시 채운다.
잠시 후.
“머리가 조금…”
그녀가 관자놀이를 누른다.
페리클레스가 일어나
부엌으로 간다.
물을 가지고 돌아온다.
길고 두터운 유리잔.
"여기."
"고마워요."
아스파시아는 한 모금 물을 마시고
컵에 이마를 댄다.
두꺼운 유리가
부드럽게 찬 기운을
그녀의 이마에 전한다.
냉동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난다.
페리클레스는
아이스크림을 꺼내고
찬장으로 가
작은 통의 뚜껑을 연다.
말린 찻잎.
베르가못 향이 방 안에
아주 얇게 번진다.
위스키의 오크 향 위로,
시트러스 향이 겹친다.
그는 포트에 물을 올린다.
아스파시아는
소파에 앉은 채 그걸 지켜본다.
물이 끓기 직전,
찻잎을 넣는다.
잠깐.
컵에 따른다. 색이 맑다. 그리고—
작은 숟갈로 꿀을 한 번. 한 번만.
그는 컵을 그녀 앞에 놓는다.
"이게…"
말을 하다 멈춘다.
설명하지 않는다.
아스파시아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 뒤에 남은
타는 듯한 흔적을
꿀과 홍차가 부드럽게 감싸 준다.
생각이 조금 늦어진다.
페리클레스는 아무 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컵에 덜어
아스파시아 앞에 놓는다.
스푼이 컵에 닿으며
맑은 소리가 난다.
아스파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숟갈을 입에 넣는다.
차갑다.
너무 차가워서
혀가 잠깐 멍해진다.
그러다—
아스파시아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싼다.
따뜻하다.
유리 너머로 온도가 천천히 올라온다.
한 모금 더.
혀 위에 남아 있던
위스키의 쓴맛이 정리된다.
닦인 것처럼.
숨이 조금 깊어진다.
아까까지 어깨에 걸려 있던 무게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간다.
눈꺼풀이 조금 무거워진다.
집중이 풀린다.
숫자.
계약.
통장 잔액.
순서대로 있던 것들이 서로 겹친다.
경계가 흐려진다.
아스파시아는
자기 몸에서 익숙하지 않은 신호를 느낀다.
생각보다 심박이 느리다.
손끝. 발끝에서 촉수가 접히듯,
감각이 안으로 모인다.
페리클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잔을 들고 있지만 마시지 않는다.
아스파시아는
컵을 내려놓는다.
탁.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난다.
“…이상하네요.”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머리가 멀쩡해요.”
페리클레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거예요.”
아스파시아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뜬다.
방의 조명이 아까보다 부드럽다.
아니, 내 눈이 바뀐 건가.
그녀는 깨닫는다.
지금 이 상태에서는
결정이나 판단을 잘 못 하겠다.
아스파시아는
그 사실이 조금 무섭고,
조금… 편하다.
프로젝트.
실패.
숫자.
계약.
모두 잠깐 멀어진다.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보지 않는다.
소파 끝에 앉아 잔을 천천히 돌릴 뿐.
그 침묵이 위로보다 더
위안이 되었다.
아스파시아는
스푼을 내려놓는다.
"고마워요."
목소리가 떨린다.
페리클레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요.”
아스파시아의 눈에
눈물이 조금 고인다.
"이렇게..."
말이 끊긴다.
페리클레스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온다.
20cm.
"아스파시아."
"...네."
그는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본다.
처음으로, 정면으로.
"지금은 쉬어도 돼요.
쉬어도 돼요. 괜찮아요.
오늘은 혼자 있지 말아요."
그는 이어서 말한다.
"당분간 여기 있어도 돼요."
아스파시아의 숨이
아주 잠깐 멈췄다.
"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요."
"지금은 회복이 먼저예요."
그는 그녀를 안는다.
담요가 어깨를 덮는다.
체온이 스며들어온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셔츠 소매를 스친다.
살아 있는 감각.
그 순간, 안도감과 함께
한겹 공기가 벗겨진 듯,
울렁거리는 불안이 스친다.
하지만 아스파시아의 몸은
이미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페리클레스 아파트 - 새벽 2시
아스파시아가
페리클레스의 품에 기대어 있다.
울음은 멎었지만
숨은 아직 고르지 않다.
페리클레스는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괜찮아요?"
"...네."
거짓말.
하지만 그는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방식으로 곁에 남는다.
창밖.
서울의 밤.
불빛이 하나 둘 줄어든다.
아스파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저... 집에 갈게요."
"지금요?"
"네."
"이 시간에?"
아스파시아는 시계를 본다.
새벽 2시 15분.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위험해요."
아스파시아는
핸드폰을 꺼낸다.
"택시 부를게요."
"새벽 2시인데."
"...알아요."
"혼자 가면 위험해요."
'위험해요.'
그 단어.
맞다. 위험하다.
새벽 2시. 혼자. 택시.
하지만 더 위험한 건-
돌아가는 것.
페리클레스가 말을 잇는다.
"소파에서 자면 돼요."
“오늘은 그냥… 여기 있어요.”
아스파시아는 그를 바라본다.
거절할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린다.
"...소파에서요?"
"네."
"당신은요?"
"저는 침실에서 자요."
그가 바로 일어난다.
"이불 가져올게요."
그가 침실로 들어간다.
아스파시아는 소파에 앉아 있다.
'지금 아니면
못 나갈 것 같은데.'
김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 붙잡고 버티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붙잡은 게 아니다.
그냥... 잠깐 쉬는 것 뿐이야.
페리클레스가 돌아온다.
"여기요."
이불과 베개를 소파에 펼친다.
"불편하면 말해요."
"...괜찮아요."
그는 물 한 잔을 탁자 위에 놓는다.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요."
"네."
그는 침실 문으로 향하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아스파시아."
"...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잘 자요."
문이 닫힌다.
페리클레스 아파트 - 새벽 2시 30분
아스파시아는 소파에 눕는다.
이불이 부드럽다.
베개에서는 그의 냄새가 난다.
시더우드와 앰버 향이 난다.
세탁세제의 잔향인가,
그의 일상.
고급 자재로
마감되어 있는 천장을 본다.
어둡다.
하지만 창밖 불빛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이게 맞나?'
모르겠다.
하지만 편하다.
이상할 만큼.
몸이 먼저 긴장을 푼다.
조금만 더 누워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페리클레스 침실
페리클레스는 침대에 눕는다.
천장을 본다.
벽 너머 거실에
그녀가 있다.
급할 필요 없다.
지금은 그녀가
스스로 고른 자리다.
그는 눈을 감는다.
방 안은 조용하다.
서울의 밤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페리클레스 아파트 - 아침 9시
눈부신 햇살이
창으로 들어온다.
아스파시아가
햇빛에 눈을 뜬다.
잠깐 멍하다.
'...여기가 어디지?'
천장이 낯설다.
고개를 돌린다.
거실.
넓은 창.
야경 대신 아침 햇살.
'...아.'
페리클레스 집.
몸을 일으킨다.
이불이 단정하게 덮여 있다.
자기가 덮은 게 아니다.
탁자 위 물잔.
그리고 메모.
"먼저 나갔어요.
커피는 주방에.
편히 쉬고 있어요. - P"
아스파시아는 메모를 본다.
편히 쉬고 있어요.
그녀는 일어난다.
욕실로 간다.
페리클레스 아파트 - 욕실
욕실 거울에
그녀의 얼굴이 비친다.
부은 눈.
헝클어진 머리.
"...엉망이네."
세면대에는
그의 칫솔 하나.
비누. 수건.
모두 그의 것.
'빌려야 하나?'
망설인다.
하지만 입안이 텁텁하다.
칫솔을 든다.
치약을 짠다. 양치한다.
거울 속 자신.
그의 칫솔. 그의 공간. 그의 일상.
뱉어낸다.
헹군다.
수건으로 입을 닦는다.
그의 수건으로.
INTO THE 6TH H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