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8장

 가속의 시작 (2)




카페 정원, 밤 9시.



아스파시아가 도착한다.
계단이 보인다.




직원이 응대한다.




“루프탑이시죠?”



“네.”



“5층입니다.”



계단을 오른다.

위로 갈수록 공기가 달라진다.
도시 소음이 얇아진다.


페리클레스가

창가에 앉아 있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일어난다.



“왔어요.”




“네.”





테이블 위에는 맥켈란 18년산.

글라스 두 잔.
글라스 안의 얼음은

아직 녹지 않았다.


아스파시아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건다.

자리에 앉자

페리클레스가 잔을 민다.


그녀는 잔을 들고

바로 한 모금 마신다.

목이 타오른다.

속이 조용해졌다.





“프로젝트가 중단됐어요.”





페리클레스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자기 잔을 든다.

마시지는 않았다.



오랜 침묵 후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럴 때 보면요.

“사람이 제일 피하고 싶던 게
튀어나와 버리더라고요.”




뒤늦게 향을 음미하던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피하고 싶던 거요?”




“네. 자기 안에 있던 거.

평소에 잘 안 보이던 거.

제 경우 그랬어요.

힘들었을 때마다 꼭."



“그런데 융이 그랬잖아요.
그림자를 마주해야

자기 자신이 된다고.”




아스파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아."




그녀는 다시 잔을 들었다.




"정신분석 좋아하세요?"




페리클레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스파시아는

살짝 날카로워진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지금, 자기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 말이 위로가 되리라
진심으로 믿고 있다.




"네. 조금요.

지금의 고통이요,

망가지는 과정은 아닐 거예요.
오히려—"



아스파시아는

입술 쪽으로 잔을 기울인다.

독한 알코올이 식도를 긁는다.

고통이 선명해진다.

차라리 이게 낫다.





“그로프는 어떠세요?”




“…?”




"환각 상태에 빠진 사람

수만명 분석해서

의식의 지도 그린 사람이 있어요.”




잠깐의 정적.



“당신이 말한

그림자 단계같은 거,
그 사람 기준에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단계라던데.


그래서 그림자 아닐까 싶네요.

실체도 아닌 것.

전 그런거 신경 안써요."




타는 듯한 감각이

기분 좋아졌다.


숨을 쉴 때마다 입 안에서

아름다운 맥켈란의 향이 올라온다.

내일 머리아프겠지.

비싼 낭비.




아스파시아는 생각한다.


프로젝트 실패.

중단 통보 메일.

통장 잔액.


너는 그걸 그림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내 통장 뒤에

그림자처럼 늘어선 것들이

뭔지 알고는 있을까.


그건 차라리....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림자 말고

저승사자 만나보고 싶네요."




얼굴과 말투는 달콤하고,

내용은 날카롭다.




아스파시아는

남은 위스키를 들이킨다.


페리클레스는 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그의 손이
그녀 손등 위에 닿는다.


두 손 사이에

잠시 전기가 흐른다.





“근데 당신 말투…”




잠깐 멈춘다.




“…사람을 가만 못 두네요.”








아스파시아는

그의 손을 바라본다.


따뜻하다.
크다.

맥켈란 18년.

마이너스 통장.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녀는 피로했다.
정신을 차리려면, 차릴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진짜.”




 반말.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와의 관계를

되짚어 봤다.
애인 비슷한 거였지.

 

 
그런데 그 선이 어디였지...

그때 마신 와인 이름밖에

생각이 안 나네.
시계 값이랑.



아스파시아는

손을 빼지 않는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잔은 비었지만.




"그럼..."




“내 그림자,
당신이 대신 들여다볼래요?”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본다.




“그러고 싶어요.”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인다.




“당신이 혼자 보지 않아도 되게.”






순간 공기가 무거워진다.

도시 불빛이 

그 무게로 흔들린다.




“차 한 잔만 더 할래요?”





“…어디서요?”





그는 다시 짧게 망설였다.

아주 잠깐.




“제 집에.”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고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진심이 있다.
그리고 뭔가 더.


그것이 뭔지 아직 모르지만,

좋은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이 먼저 움직인다.





“…짧게만요.”





페리클레스는 웃는다.




“네. 짧게만.”







서촌 골목 - 밤 11시 50분



두 사람이 나온다.
밤공기.
차갑다.


페리클레스가 

차 앞에서 잠깐 멈춰
아스파시아 쪽으로 문을 열어준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고 탄다.






히터가 켜진다.
따뜻한 바람.

아스파시아는 안전벨트를 맨다.
버클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다.


창밖을 본다.

페리클레스가 묻는다.




“피곤해요?”




“…조금요.”





“집 먼저 들를까요?”





아스파시아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앞유리를 본다.





“…아니요.”




잠깐 후.





“차 한 잔만이라고 했잖아요.”




페리클레스는 웃는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네.”





신호등.

빨간불.



차가 멈춘다.

아스파시아의 시선이
기어 위에 놓인 그의 손에 머문다.


루프탑에서 그 손이 

자기 손등에 올라왔을 때.
따뜻했다.



초록불.

차가 다시 움직인다.




아스파시아는 창 밖을 본다.

서울의 밤.

불빛이 반짝인다.


밤에 사람들은 불을 켜고,

불빛이 향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그녀는 이 불빛들을 

가지고 싶었다.

아니, 이 불이 되고 싶었다.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집이 좀 높아서,

야경이 괜찮아요."




그녀는 안다.

들어가면 달라질 거라는 걸.




 "...그래요?"



  "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궤도를 잃은 그 자리.


그 곳에선 

더 이상 불이 켜지지 않는다.




차가 멈췄다.






고급 아파트의

불 켜진 로비.

경비가 둘에게 인사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좁은 금속 상자 안에 둘만 남는다. 


 가볍게 울리는 기계음.

엘레베이터가 위로 올라간다.





거울 속에 

두 사람이 나란히 비친다.


 페리클레스는

약간 그녀 쪽으로 기울어 있다.

의도는 없어 보인다.


엘레베이터 거울에 

두 사람이 비친다.





층 숫자가 바뀐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귀가 살짝 먹먹해진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는다.

어지럽다.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인다. 




 “네.”




 짧은 대답. 


엘리베이터가 잠깐 흔들린다.


 그의 손이 무의식처럼 벽을 짚는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서울의 불빛은 작아진다.

 그녀는 생각한다.


 높은 곳에서는

사람이 작아진다.




 아니, 작아 보일 뿐이지.





띵.




 문이 열린다. 

 공기가 달라진다.


 아스파시아는

먼저 내리지 않는다. 

그가 한 발 물러설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INTO THE 6TH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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