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8장

 가속의 시작 (1)





아스파시아 작업실 - 오후 3시




아스파시아는 메일을 읽고 있다.
 모니터 빛이 얼굴을 비춘다.



검토 결과, 현 단계에서는
추가 투자 진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추후 재논의 가능성은 열어두겠으나
당분간은...




스크롤이 멈춘다.
아스파시아는 멍하니 화면을 본다.



손이 트랙패드에서 떨어진다.

살짝 떨리는 손은 

갈 곳을 찾다 

책상 모서리를 잡는다.


아스파시아는 숨을 고르며
의자에서 일어난다.



두 걸음.


무릎이 꺾인다.
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프지 않다.

귀 안쪽이 웅웅 울린다.
카페에서 들리던 음악 같은 게
아주 멀리서 재생되는 느낌.

손바닥이 바닥에 닿아 있는데
닿아 있는지 확신이 안 선다.

심장이 이상하게 뛴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울린다.




쿵.

쿵.

쿵.



가슴 안쪽이
텅 빈 드럼통처럼 울린다.



손바닥이 바닥을 짚는다.
플라스틱 마루.

먼지 하나. 머리카락 하나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인다.




"...아."




창밖에서
봄이 되기 직전의 겨울 햇살이
들어와 먼지와 머리카락을 비춘다.


빛이 예쁘다.

아스파시아는
그 빛 속에 주저앉아 있다.

 프로젝트 강제 종료.

 몇 년간의 노력이 끝이 났다.


빛이 너무 선명하다.
세상이 부서져 보인다.




이 빛은 내 실패와 상관없이

계속 쏟아진다.


봄은 나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빛이 닿는 모든 게
얇은 유리처럼 보인다.

책상도.
의자도.
자기 자신도.

조금만 힘을 주면
산산이 부서질 것처럼.



꺼진 노트북 화면에
그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된다.



"다 걸었는데..."



말이 끊긴다.



안 됐네.




‘다 걸었는데…’




그 말이 공기 중에서 떠 있다.

귀에서 분명 들리는데
자신의 말 같지가 않다.

몸 안쪽 어딘가가 무너진다.
그녀는 그 느낌을 모른 척한다.

핸드폰이 진동한다.





김교수


아스파시아는 핸드폰을 본다.
받지 않는다.

전화는 한참을 울리다 멈춘다.











아스파시아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신의 몸은,

흐르는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창 밖으로

차가 한 대 지나간다.

뒤이어 아이 둘이 웃으며 지나간다.


어디선가
택배 박스가 떨어지는 소리.



세상은 계속 움직이는데
그녀만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화면 같다.


눈을 깜빡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햇빛은 조금씩 이동하며
그녀의 그림자를 밀어낸다.






핸드폰이 다시 울린다.
김교수.


이번엔 받는다.





"...네."



목소리가 갈라진다.




"아스파시아, 괜찮아요?"




"...네."




거짓말.



"지금 어디예요?"



"...작업실이요."



잠깐의 침묵.



"6시에 학교 앞 카페.

잠깐 봅시다."



아스파시아는 창밖을 본다.
빛은 여전히 차갑고 찬란하다.


"...네."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아스파시아는

노트북을 열었다 닫고,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고,
창밖을 몇 번이고 바라봤다.


시간이 흘렀지만
몸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김교수의 학교 근처.
겨울과 봄 사이의 햇살.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오한이 드는 것 같아

코트 깃을 세운다.





학교 앞 카페 3층




김교수는 이미 앉아 있다.
커피 두 잔이 먼저 나와 있다.

아스파시아가 자리에 앉는다.



“감사합니다.”




김교수는 고개만 끄덕인다.
둘 다 먼저 말하지 않는다.



카페 소음이 흐른다.
김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메일 왔죠.”



“…네.”



“언제요.”



“오늘.”


“오전?”


“오후.”



김교수는

잠깐 그녀를 본다.



“그럼 아직 정리 안 됐겠어요.”



아스파시아의 심장이

한 번 더 뛴다.


쿵.



“…네?”


김교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프로젝트 접히면

보통 그래요.


머리는 이해하는데

몸이 못 받아들여요.”





그의 시선은 부드럽지 않다.
관찰자의 눈이다.

아스파시아의 손이

컵을 감싼다. 뜨겁다.


심장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진다.



“틀린 건 없었는데…”



김교수는 바로 답하지 않는다.
커피를 천천히 마신다.




“그렇겠죠.”



"네...?"




"맞았을 거예요."




“…그럼 뭐가 문제였죠?”



그는 시선을 돌려

창 밖의 겨울 나무를 바라보았다.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이에요?”



“타이밍.”


김교수는 짧게 말한다.



“지금이 아니었던 거죠.”



정적.




아스파시아의 심장이

다시 울린다.
쿵.


느리게 그 진동이 몸에 퍼져나간다.




“이제 전 뭘 해야 하죠…”


김교수는 그녀를 본다.
한 박자 늦게 말한다.


“정리.”


“…정리요?”


“네.”



그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손가락이 길고,

움직임이 절제되어 있다.


“잘못된 건 버리고,
쓸 수 있는 것만 남기는 거.”


“전 다 걸었는데요.”



“그래서 접어야 해요.”



둘의 시선이 부딪힌다.



“다 걸었으면,
다 잃기 전에 접는 게 베테랑이에요.”


그는 가방에서

얇은 서류를 꺼낸다.


탁.


“당신 프로젝트 로그.”


한 장 넘긴다.


“사용자 반응이 가장 좋았던 지점.”
“이탈 급증한 구간.”



또 한 장.



"그리고 이건

당신이 제일 잘한 선택들."

“이건 다시 쓸 수 있어요.”




그는 잠깐 멈추고

다른 종이를 뒤적인다.


“이건 버려야 하고.”



그는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말한다.



“그리고 하나 더.”



아스파시아의 손이 멈춘다.



“투자 제안 받았다 했죠.”



공기가 약간 식는다.



“…네.”



“얼마나 주겠답니까.”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저한테 3일 전 연락이 먼저 왔어요.

메인 투자자가 제 쪽 사람이어서.

그래서 데이터 정리를 좀 해 놨어요."




그는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 쪽 자금 사정에

문제가 생긴 거고,


당신 문제가 아니에요.

근데 접어야 합니다."




아스파시아의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뛴다.




“더 끌면 돈도,

판단력도 같이 썩어요.

사적으로 투자받을 포맷은 아니니

잘 생각해요.”





잠깐의 정적.



카페 소음이 다시 들린다.


김교수는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둔다.


“정리하고 나서

필요하면 연락해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스파시아,

이젠 놓는 게 실력입니다.

큰 흐름은 당신 능력과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그걸 타는 거지,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아스파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뒷모습이 계단으로 사라졌다.












버스 정류장 - 저녁 7시



아스파시아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엔 서늘한 바람이 분다.

손을 호주머니에 넣는다.
잠시 후 핸드폰을 꺼낸다.



연락처 목록.
스크롤.
ㅍ.

페리클레스


엄지가 이름 위에서 멈춘다.
머릿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겹친다.


"힘들 때 연락해요."
"혼자 버티지 마요."
"내가 있어요."





가슴이 다시 뛴다.


쿵.

그 진동이

몸 안에 느리게 번진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버스 불빛이 멀리서 다가온다.
도시가 웅웅 울린다.


타이핑.


“오늘…”



지운다.




“혹시…”

지운다.



숨이 짧아진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뛴다.




타이핑.


“오늘 시간 괜찮아요?”



자신이 쓴 문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메시지는 빚이 될 수도 있다.’



전송.



버스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탄다.
아스파시아도 오른다.





창가 자리.
서울의 불빛이 유리창에 번진다.
그 불빛이 강처럼 흘러간다.


저 수많은 창문 안에서도

누군가는 지금 무언가를 잃고 있겠지.





아스파시아는 그들을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핸드폰 화면에
읽음 표시가 뜬다.

1초.
2초.
3초.

가슴이 또 느리게 울린다.




쿵.



말풍선.
타이핑 중…


손바닥이 서늘해진다.



페리클레스:
“기다리고 있었어요.”



잠깐 멈췄던 숨이

다시 풀렸다.



“어디로 갈까요.”



저 짧은 문장이

이상하게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동시에

심장 박동의 속도를 올린다.



아스파시아가 답한다.



“…아무데나요.”



전송.





페리클레스:

“‘정원’ 어때요. 9시.”





아스파시아는 시계를 본다.
7시 15분.





두 시간.


“좋아요.”


전송.



페리클레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그 질문이

화면 위에서 오래 머문다.




“…네.”
“조금.”



전송.




페리클레스:
“알겠어요.”
“9시에 봐요.”





아스파시아는 화면을 끈다.


버스가 속도를 낸다.
서울의 밤이 창 밖으로

길게 늘어진다.

그녀의 심장도
같은 방향으로 가속한다.



이건 위로일 수도 있다.
어쩌면...기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돌아갈 수 없는 
레이스의 

출발선일지도 모른다.













버스가 멈춘다.
“XX동입니다.”

아스파시아는 일어난다.
내린다.

공기가 차다.






아스파시아 집 앞 - 저녁 7시 10분



집 앞에 선다.
비밀번호를 누른다.
삐.





불이 켜진다.
집 안은 조용하다.
조용함이 너무 또렷하다.


코트를 벗는다.
소파에 앉는다.

천장을 본다.



시계 소리.
똑.
딱.
똑.


두 시간.

핸드폰을 본다.





페리클레스:
“9시에 봐요.”





눈을 감는다.
이게 맞나.


모르겠다.
하지만 가고 싶다.







욕실 - 저녁 7시 30분



거울 앞에 선다.
피곤해 보인다.



“…괜찮아.”



목소리는 낮고 메마르다.



거짓말.

샤워를 한다.
뜨거운 물이 어깨를 때린다.




피부가 붉어진다.
생각이 느슨해진다.
결정은 물 속에서 항상 쉬워진다.





아스파시아 집 - 저녁 8시



옷을 고른다.
검은 터틀넥.
코트.

과하지 않게.
약해 보이지 않게.

립스틱을 바른다.
지운다.
다시 바른다.

이번엔 지우지 않는다.





8시 10분.


아직도 시간이 남는다.
기다림은 늘 길다.



핸드폰을 다시 본다.


페리클레스:
“조심히 오세요.”



그녀의 얼굴에

왠지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페리클레스의 아파트 - 저녁 8시


페리클레스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채운다.
검은색.

거울을 본다.
표정은 단정하다.
눈은 다르다.



핸드폰을 본다.



“조금.”


그는 안다.
이건 도움 요청이 아니다.
허락이다.



메시지를 쓴다.



“괜찮아요.”




지운다.



“제가 있어요.”



지운다.
보내지 않는다.
9시에 말하면 된다.




그는 소파에 깊이 몸을 파묻는다.


오늘은 듣기만 하자.
위로만 하자.
밀어붙이지 말자.




머리와 다르게 가슴이 뛴다.


냉장고를 연다.
위스키.
아이스크림.

그녀가 단맛을

싫어한다고 했던 걸

기억한다.


그래도,
혹시 모를 밤을 위해.









아스파시아,
       시계를 본다.


              페리클레스,
시계를 본다.


각자의 공간.
각자의 계산.




아스파시아는 생각한다.
이게 약해지는 건가.

아니.
이건 선택이다.





페리클레스는 생각한다.
오늘은 조심하자.

하지만 이미
마음은 다음 길을 정해 두었다.

둘 다 안다.

오늘 밤은
선을 넘어갈 거라는 걸.





INTO THE 6TH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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