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7장

 낙하 전의 정적 (5)






페리클레스는 눈을 크게 뜬다.





 "...저는 청구 안 할 건데요."




"지금은요." 




 아스파시아는 차분하다.





 "근데 나중에는 모르죠."





 "저는 절대—"




 "당신도 몰라요." 




 아스파시아는

그의 말을 자른다.





 "아무도 미래의 자기를

장담 못해요."






 페리클레스는 입을 다문다.

 침묵. 길고 무거운 침묵.





 웨이터가 물을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간다.





 페리클레스가 말한다.





 "...그럼 저는 뭘 해야 하죠?" 




 아스파시아는 그를 본다.




 "기다려줘요."




 "기다려요?"





"네." 





 아스파시아는 미소 짓는다.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제가 제 속도로

제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왜지.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본다. 





 "...그게 언제인데요?" 





 "몰라요." 





"3개월일 수도 있고, 

6개월일 수도 있고,

1년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오래요?"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동안 저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아뇨."




건드리면 안되는 뭔가를

건드렸다.





 아스파시아는 말한다.




 "당신 일 하면 되죠.

유튜브, 강연, 방송."





 "...그럼 우리는요?"





아. 우리.




 "우리는 우리대로

계속 만나면 되죠."




 페리클레스는 등을 곧추세우고 

아스파시아를 바라본다.


눈빛이 바뀌었다.




여기.




 "사업 얘기만 빼고요?"




"네."




 페리클레스는 테이블을 본다.

 물잔. 포크. 나이프.



좋아, 시야가 풀렸다.




 "...이해가 안 돼요." 




 그는 솔직하다.





 "저는 당신 좋아해요.

 그래서 돕고 싶은 건데,

 왜 그게 문제가 되죠?"





 아스파시아는 잠시 생각한다.




그의 현재 화두면서,

화제가 전환될 것.

찾아.






 "당신 영상 만들 때 AI 쓰죠?"





"...네?" 




 갑작스러운 질문.




"네. 가끔요."




"AI가 당신보다 빠르죠?"




 "네."




"당신보다 정확하죠?"



 "...그럴 때도 있어요." 




 "근데 왜 AI한테 다 안 맡겨요?"





 페리클레스는 멈춘다.





 "...그건..."




"왜요?"





 아스파시아는 기다린다. 





 페리클레스는 생각한다. 







 "...내 거가 아니니까요.


난 페리클레스잖아요.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말한다는게 중요해요.


아무리 커질 수 있다 해도

중심이 나여야 해요."





 "정답." 





 아스파시아는 미소 짓는다. 






 "빠르고 정확해도, 

내 거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본다. 





 "...저는 AI가 아닌데요."





"알아요."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당신 돈으로

제 프로젝트 키우면,

그게 제 거 같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도 저 자신으로

뭔가를 세상에 퍼뜨리고 싶어요."

당신처럼요.





 페리클레스는 잠시 말이 없다. 




 "...그럼." 





 그가 말한다. 





 "저는 지금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네요."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를 본다.





끝나지 않은 건가?





"...그렇게 느껴져요?"





 "조금은요.


 당신 인생에서, 

저는 그냥 대기 상태 같아서."



잠시 사이를 둔 후

그는 다시 말한다.




"...노력해볼게요.


기다리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건 알지만." 




 잠깐 웃는다. 




 "제가 잘 못 기다리는 타입이라."




"근데." 




그는 덧붙인다.



"당신 속도를

망치고 싶지도 않아요."










 메뉴판을 펼친다.

 조용하다.

 와인잔에 조명이 반사된다. 




 아스파시아는

메뉴를 읽는 척하지만

사실 한 줄도 안 들어온다.



 페리클레스는 물을 마신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다.





 “아스파시아.”





 그가 조용히 부른다.





 “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녀는 고개를 든다.




 “…뭘요?”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똑바로 본다. 




 “당신이 나를 밀어내는 건

독립 때문이에요?”



 그는 말을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기묘하게 빛나는 눈으로 말을 이어간다. 





 “…아니면.” 




 그는 말을 삼킨다. 




 “뭔가에 의존하는게 

무서워서예요?”





 공기가 다시 바뀐다.




아스파시아는 잠깐

자기 몸의 안쪽이

천천히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못 기다리네.

김교수 말이 맞았어.' 




 “저는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아요.” 




 페리클레스는 웃지 않는다.





 “그건 당신 방식이고.”





 그는 낮게 말한다.





 “내 방식은 아니에요.”





 잠시 침묵. 

와인이 도착한다.

 코르크가 빠지는 소리.

 웨이터가 따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든다.

 부딪히지 않는다.




페리클레스가

정적을 깨고 부드럽게 말한다. 




 “기다릴게요. 속도 존중해요.” 




“대신.”




  그는 잔을 내려놓는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도망가지 마요.”





 아스파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뭐지...? 

아직 내가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아니, 저긴 내 시야로 닿지 않는다. 




 “제가 왜 도망가요?”




 그녀가 묻는다.


 아, 모르는 곳에서 말이 들어오면

더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조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반문하자.

 



아스파시아는 와인을 마신다.

컵의 입술에 붉은 자국이 남는다.


그 붉은 자국을

컵을 감싸듯이 아주 느리게

손가락으로 닦아낸다.

페리클레스가 잘 볼 수 있는 움직임으로.





 “당신은

왜 그렇게까지 하죠?” 





 페리클레스는 잠시 생각한다. 




 “나는.” 




“가볍게 좋아하는 법을 몰라요.”




 그는 솔직하다. 




 “좋으면 끝까지 가요.”



 아스파시아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빨라진다.


열이 오른다.

 이건 진심도 따뜻함도 아니다. 



 이건.

낙하 전의 정적.




그녀가 말한다. 




 “그럼 끝이 어디죠?”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본다. 





 “…아직 안 정했어요.”





 잔잔하게 말한다.





 “같이 가보려고요.”




 메뉴판은

여전히 펼쳐져 있다. 

 아직 둘다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다.



 유리창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살짝 어긋나 있다.


 겹치지 않는다.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 밤



 촛불이 흔들린다.

와인잔에 도시 불빛이 부서진다. 


 두 사람은 잔을 들고 있다.

 부딪힌다. 맑은 소리.

 하지만 둘 다 눈은

상대의 입술에 잠깐 멈춘다.

 잔을 내리는 속도가 미묘하게 다르다.









EXT. 레스토랑 앞 – 밤



 검은 코트. 네이비 코트.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다.

신호등이 빨간색에서 초록으로 바뀐다.



 아스파시아가 먼저 걷는다.

페리클레스가

반 보 뒤에서 따라온다.


 그는 잡지 않는다.

그녀는 기다리지 않는다. 

 하지만 속도는 맞는다.









아스파시아 작업실 – 늦은 밤



 모니터 빛이 얼굴을 비춘다.

 투자 제안 이메일이 열려 있다. 


 1억 원 / 지분 15%


 그녀는 화면을 닫지 않는다.

 그냥 바라본다. 

손가락이 트랙패드 위에 멈춘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조금 올라간다. 









페리클레스 대기실 – 같은 밤



 거울 앞. 

메이크업을 지우는 손.

 수건을 내려놓는다.


 핸드폰 화면.


 아스파시아의 이름.


 그는 바로 받지 않는다.

한 번 숨을 고른다.

 그러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오늘 당신 표정, 되게 좋았어요.”







한강 다리 위 – 밤




바람이 분다. 


아스파시아가 난간에 손을 얹는다.

 페리클레스가 옆에 선다.


 서울의 빛이

강물 위에 번진다.



 “행복해요?”





 그가 묻는다.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지금은요.”



 “지금은?"




 “네.”




 한 박자 정적이 깔린다.




 “앞은 아직 몰라요.”




 페리클레스는 웃지 않는다.




 “…몰라서 좋은 거 아닌가요?”





 그녀가 그를 본다.

 눈동자에 도시 불빛이 반사된다.





 “당신은 몰라서 불안해요?” 




 “아니요.”




 그는 말한다.





 “몰라서 더 가고 싶어요.”


 잠깐의 침묵. 

 바람이 코트 자락을 흔든다.




 아스파시아가 손을 뻗는다.

 그의 코트 단추를

천천히 정리해준다.



 의식적인 터치. 

손이 닿는다. 멈춘다.




 “지금은 이 정도가 좋아요.”




 그녀가 말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하지만 둘 다 안다.

 이건 합의가 아니라 유예라는 걸.






도시 야경 – 밤



고층 아파트.

불 켜진 창.

그 중 하나.

 두 그림자가 포개지고 불이 꺼진다. 




 성공은 속도를 요구하고

사랑은 깊이를 요구한다.

 둘은 아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INTO THE 6TH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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