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5장 

지켜주고 싶다는 말 (3)


 


번지점프장 도착, 오후 12시 30분






바람이 거칠다.

 지평선이 보이는 고지대.


 푸른 하늘 아래, 낭떠러지 위에

 페리클레스와 아스파시아가

안전장비를 착용한 채 나란히 서 있다.



 언제든 뛰어내리면 되는 상황, 


 페리클레스는 고개를 들어 

 강 아래로 굽이치는 물길을 바라보며

 깊은 감상에 젖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사랑이란…

바타유가 말했듯,

 자기 해체의 충동과 신성을

 동시에 품은 파열인 것 같아요.


 인간은 자기 파괴 속에서 의미를…" 





 "오, 그럼 지금 

파열당하고 싶단 말이군요?"





 페리클레스가 흠칫 돌아봤다.






 "…?"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말끝을 잇기도 전에 그를 툭,

낭떠러지 아래로 밀었다.






 "으아아아아악?!?" 





 하지만 발엔

단단히 묶인 번지 로프.


 공중을 가르며 떨어지던 페리클레스는

 팽팽하게 고무줄처럼 튕겨 올라왔고,

허공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로 비명을 멈췄다.




위에서 바라보는 아스파시아.

 그녀는 난간에 팔을 얹고 빙그레 웃었다.




 "바타유는 몰랐지.

 낙하 전에 줄부터 묶는 애들은

 죽지도 않고 파열도 못 해."




 아래에서 고개를 빙글 돌린

거꾸로 된 페리클레스의 얼굴.





 "아스..."






 아스파시아는 손을 흔들었다.






 "재밌게 놀다 와요!"  











돌아오는 길, 오후 4시

 


 
페리클레스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스파시아는 조수석에서

 여전히 선글라스를 쓴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재밌었어요?" 




 아스파시아가 물었다.




 "…네."




 페리클레스는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사실, 재밌었다.


 낙하의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올라올 때는 살아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스파시아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감정 하나 없는 눈으로.

그녀는 그를 밀면서 웃고 있었다.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페리클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그녀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다.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아스파시아가 되물었다.




 "네? 아, 네. 괜찮아요. 왜요?

약속이 하나 있어서요."




 "누구랑요?"



 페리클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K대 교수님이요.

 프로젝트 관련해서."




 "남자예요?"



 "네." 




 페리클레스는

 핸들을 더 세게 쥐었다. 




 "혼자 가세요? 어디서 만나요?" 





 아스파시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녀의 눈이 페리클레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K대 근처 카페요. 왜요?"



 페리클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에요.

조심히 다녀와요."





 "네."




 아스파시아는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페리클레스는 전방을 응시했다.








저녁 6시, 대학 근처 카페


아스파시아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분위기. 

 책을 읽는 사람들.



 창가 자리에

김 교수가 앉아 있었다.



 50대 중반.

회색 머리.

안경.

 흰색 셔츠에 베이지 재킷.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스파시아가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파시아 씨?"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김 교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악수했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아스파시아는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교수의 책이 놓여 있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스파시아는 책을 가리켰다. 




"좋은 책이네요."




 "읽으셨어요?"



 "네. 몇 번." 






 김교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크 피셔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특히 당신 같은 젊은 분은 더더욱."





 "저는 이쪽에 관심이 많아서요."





 아스파시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교수님, 제가 메일에 썼듯이,

 저는 대중의 욕망을

 디자인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어요." 




 "프로그램이요?"




 "네. 하지만 제게 부족한 게 있어요."





 아스파시아는 잠시 멈췄다. 




 "저는 한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불특정 다수는…

아직 모르겠어요." 




 김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제가 연구하는 분야죠.

 집단심리, 군중행동."




 "그래서

교수님이 필요합니다."





 아스파시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김교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진심이 있었다.

 계산적이지만, 동시에 솔직했다.





 "흥미롭네요.

계속 말씀해보세요." 




 

아메리카노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아스파시아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마크 피셔가 말했죠. 

 '우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라고."






"맞아요."



 김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모르죠.

 자기 탓을 하면서 살아가요."




 "그래서

제가 하려는 건…"




 아스파시아는 잠시 멈췄다. 





"그들에게

구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냥 구조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김교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구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안전함을요?" 




 "네." 




 아스파시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람들은 진실을 원하지 않아요.

진실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원하죠."



 김 교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당신은…

위험한 사람이네요." 




 아스파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도요."




김교수는 안경을 벗어 닦았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감정을 설계하는 거예요." 







 아스파시아는

노트북을 꺼냈다.


 화면에는

복잡한 다이어그램이 떠올랐다. 








 "여기 봐주세요." 




 그녀는 화면을 김 교수에게 돌렸다. 






[대중심리 3단계 모델]


 1. 트리거 (감정 촉발)

2. 패턴 (집단 동조)

3. 고착 (구조화)






 "첫 번째 단계는

감정을 촉발시키는 거예요.

 분노든, 희망이든, 불안이든."





 "그 다음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모아요.

 그들은 서로를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고 느끼죠." 




 "집단 동조군요."




 "맞아요.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아스파시아는

화면을 스크롤했다.



 "그 집단에게

구조를 제공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다'라는 정체성을." 



 김교수는 화면을 응시했다. 




"…이건

정치 캠페인이네요."




"네.

하지만 정치가 아니에요." 





 아스파시아는

트북을 닫았다.




 "이건 그들이

현실을 살아갈 방법이에요."




 김 교수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아스파시아는 그를 바라봤다. 

 그는 지금 갈등하고 있었다.




 학자로서의 윤리와, 

 지적 호기심 사이에서.




 "교수님."





 아스파시아가 조용히 말했다. 






 "마크 피셔는

끝내 뛰어내렸지만…


 저는 그 끝을

끝이라고 믿지 않아요."





 김교수는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뭘 만들려는 거죠?" 




 "대안이요."





 아스파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피셔가 말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대안을요." 





 김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네요." 


 아스파시아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좋아요.

시간 괜찮으세요?"





 "네. 오늘은 시간이 많아요."







INTO THE 6TH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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