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6장 

익명의 손 (6)






아스파시아의 작업실 - 밤 10시


 아스파시아는

책상에 앉아 있다.

노트북 앞.



 하지만 일을 하고 있지 않다.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은 채

생각 중이다.



3천만 원 지원

이름 밝히지 않음 

대가 요구 없음

나와 비슷한 생각...


 아스파시아는

피젯 스피너를 돌린다.





"누가...나를 도와줄 이유가 있지?"





 그녀는 리스트를

적어보기 시작한다.




투자자?

이름 밝히지 않는 투자자는 없는데.

 

친구?

그런 돈 있는 친구도 없고.


가족?

연락 안 한 지 오래.


김교수 지인?

가능하지만 왜?




 그녀는 멈춘다.  




"나?"



"...왜?"


왜 나를?

왜 익명으로?

왜 대가 없이?


 나를 아는 사람 →

내 상황을 아는 사람 →

나를 도와주고 싶은 사람




 아스파시아는 펜을 멈춘다. 





 "...나를 도와주고 싶은 사람?"





 그녀의 머릿속에

몇 명이 떠오른다.


 김교수. 

 하지만 김교수는

자기 돈이 아니라고 했다. 

전화받을 때 심지어 나도 있었다.




대학 동기들. 

 다들 자기 일에 바쁘다.

그럴 사이도 아니다.


 그것보다도

성형 전 내 모습을 아는 사람과는 

연락 다 끊었다. 





 그리고.




 "...설마." 




 그녀는 핸드폰을 든다.

페리클레스의 프로필을 연다.




[페리클레스 인스타. 어제 사진]



책상 위 노트북 



"오늘도 좋은 하루였습니다.

여러분도 잘 쉬세요 :)"


좋아요 2,349개





 아스파시아는 스크롤을 내린다. 

 그의 과거 포스트들.

 일주일 전.




 그녀가 힘들어하던 그 주.

 포스트 하나.



석양 사진.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가장 의미 있는 일 아닐까요."




 아스파시아는

날짜를 확인한다.


 7일 전.

 개발팀이 연락 온 날.




 "...우연일까?"




 그녀는 댓글을 확인한다.




"페리클레스님

말씀 들으니 힘이 나요"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게 행복이죠"





 그 중 하나. 




 [leejunseok 댓글]


"형, 오늘 좋은 일 했어? ㅋㅋ" 





...이준석?


 그녀는 이준석의 프로필을 클릭한다. 



 "Full Stack Developer | Team Lead"

 팔로워: 804명


그리고,

페리클레스 팔로잉 중.

 


 아스파시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친구구나." 



 그녀는 다시 

페리클레스 프로필로 돌아간다. 

 일주일 전 포스트를 다시 본다.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날.

 개발팀이 연락 왔던 날.




 아스파시아는

 얼굴을 손으로 감싼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일이 이렇게 끝난 거라면 

코드 뿐만 아니고

내 기획에도 분명 잘못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손을 얹는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조율해야 할 것이 많....


고마움과 짜증이

동시에 훅 밀려온다.






 아스파시아는

창가로 걸어갔다. 


곧 책상으로 돌아와 

피젯 스피너를 집어 든다.


돌린다. 

 하지만 이번엔. 

회전이 불편하다.






 그녀는

스피너를 내려놓는다.

핸드폰을 든다.


 페리클레스의 프로필.

 그의 사진들.

그의 글들.






"사람들이 힘내셨으면 해서..."


"진심을 전하고 싶어요."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워요."





"진심."





 그녀는 눈을 감는다.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

돌려주지 않을 수 없겠지.

 이런 식으로 네트워크나

영향력이 확장이 되는건가.


그보다도...

왜...



 그녀는 눈을 뜬다. 



그리고 숨을 내쉬는 것처럼

작게 말한다.


 "...미안해."




떨리는 작은 목소리.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일어난다.

다시 창문 앞으로 간다.

서울의 야경.


 그녀는 핸드폰을 든다.

페리클레스에게 메시지를 쓴다.




 [DM]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할 말이 있어서요."




 그녀는 멈춘다. 




"...아니야. 문자로는 안 돼.

직접 가는 게 낫겠어."




 그녀는 시계를 본다.

밤 10시 30분.




"...지금은 너무 늦었어.

내일. 내일 가자."








페리클레스의 아파트 앞



다음 날 저녁 7시,

아스파시아가 건물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손에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있다. 

검은색 포장지. 금색 리본.


손에 차가운 땀이 배어난다.

 그녀는 핸드폰을 확인한다.



[페리클레스에게 보낸 메시지 - 1시간 전]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잠깐 뵙고 싶어서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





[페리클레스 답장]


"네, 괜찮아요.

집으로 오실래요?

주소: ○○아파트 ○동 ○호"



 아스파시아는 숨을 들이킨다. 


"...가자."



 그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페리클레스 아파트 복도


 아스파시아가

초인종 앞에 선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가

잠시 멈춘다.


"뭐라고 말하지?'

'고마워요?'

'당신이 도와준 거 알아요'?

아니면..."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일단 눌러."




 그녀는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안에서 발소리. 

문이 열린다. 

 페리클레스가 선다. 




 회색 후드.

 편한 트레이닝 팬츠.

 맨발.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우고 미소 짓는다.




"...안녕하세요."







페리클레스 거실 - 잠시 후





 깔끔한 공간. 

큰 창문으로 서울 야경이 보인다.

 소파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 차 두 잔.

 아스파시아가 선물 상자를 내민다.


 


"이거... 받아주세요."




"...뭔데요?"




"그냥... 감사의 표시예요."





 페리클레스는 상자를 받는다.


상자 안에는 짙은 갈색의 

고급 가죽 노트가 들어 있다.

작고한 유명 작가가 좋아하는 브랜드.

 

 안쪽 표지에 정갈하게 새겨진 글자.

"To someone who truly cares"


 페리클레스는 노트를 본다. 




"...이거."




"당신이 쓰는 걸 봤어요.

노트에 메모하는 거. 그래서..." 



 

"...고마워요."



 그는 노트를 쓰다듬는다.


페리클레스는

한동안 노트를 덮지 않는다.

 아스파시아도 말하지 않는다.


차에서 김이 오른다.






"근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스파시아는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뭐가요?" 




 "...프로젝트요." 





 페리클레스의 표정이 굳는다. 





"...아."




 침묵.





"당신이 도와준 거...알아요." 





 페리클레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준석씨. 당신 친구죠?" 




 페리클레스는 한숨을 쉰다.





"...어떻게 알았어요?" 




"인스타요.

당신이 올린 글이랑...

타이밍이 너무 맞아떨어졌어요."




 그녀는 그를 본다.


"왜 그랬어요?" 






 페리클레스는 창밖을 본다.  





"...그냥."





"그냥이요?"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본다. 




"미안해요."




"...왜요?" 




 페리클레스는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고백을 시작했다.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스파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당신이 김교수님 만나는 거...

질투 났어요.


당신이 저한테서 

멀어질까 봐 무서웠고요." 



 

 

"그래서 처음엔

영상도 만들려 했어요.


'선의로 접근하는 사람 조심하라'는...

김교수님 경고하는 영상이요.

실제로 그런 교수 많잖아요.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근데 쓰다가... 깨달았어요." 




"...뭘요?" 





"내가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는 걸요.

선의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통제하려던 건...

저였을 지도 몰라요." 





침묵.

 




"그래서 물러섰어요.

당신을 지켜보기만 했죠. 근데..."





 그는 그녀를 본다.





"당신이 무너지는 걸 보니까... 

더 이상 못 참겠더라고요."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이번엔 달랐어요. 

통제도 아니고 바라는 것도 없고...

그냥 돕고 싶었어요."



 "그게... 진짜 진심이고

사랑이라는 거 이제 알 것 같아요." 




 아스파시아는 눈을 크게 뜬다.




"...사랑?"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똑바로 본다.




"네.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는 미소를 짓는다.

쓸쓸한 미소.










 아스파시아는 가슴이 뛴다.





 이걸 어떻게 하지?


투자자다.

 그리고 유명인이다.

내가 하려는 걸 퍼뜨려 줄 거다.

나도 알고 먼저 연락한 거다.


도움이 되겠지,

 다음 문제가 생길 때도,

어느정도 확장을 할 때도...

 그리고...




실보다 득이 많다.

생각 끝.





아스파시아는 말했다.




"...저도요." 





 페리클레스는 놀란다.





"...네?" 





 그녀는 손을 꼭 쥔다.


김교수 앞에서

 눈물을 떨궜을 때가 떠오른다.


왜 자꾸 어긋나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게,

세상에 생각보다...



끝난 줄 알았던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나,

 그녀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도... 미안해요.

저는 매몰차게 굴었는데..."




 이번에 코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충격을 심하게 받았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근데... 당신은 대가도 없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냥 날 도와줬어요."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교수의 손이 떠오른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말하던 그 단어. 진심. 



 아스파시아는 그 단어가

지금의 자신에게

너무 가까이 와 있다는 게 불편했다.





"진심으로."





"그제야 알았어요. 

내가 얼마나 잘못 봤는지.

얼마나 오만했는지."




 페리클레스는 조용히 듣는다. 





"저는... 모든 걸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도움 받는 건 약함이라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건 

패배라고 생각했어요." 



 페리클레스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그녀는 기분이 나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녀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아니더라고요."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처음 유튜브에서

 페리클레스를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헝클어진 머리와 반짝이는 눈...

 그 눈빛의 힘을 이제 알 것 같았다. 





진심은, 힘이 있다.




그의 눈을 마주보며

평정심을 유지하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지금 필요한 건지,

아니면 방해가 되는 건지.

 아스파시아는 아직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이 힘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그는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꽉 잡는다.


 아스파시아는 잠시 흠칫하지만

손을 빼지 않는다.





"고마워요."




 "...뭐가요?"




"고백해줘서요.

진심을 보여줘서요."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쥔다. 



아스파시아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진심을 보여줘서 고마워요'? 

정말? 진짜로? 

이게 2026년 서울에서

실제로 오가는 대사라고?




하지만, 기분이 묘한 탓에

우선 다음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게 망가진 거 같았지만,

진행은 내 뜻과 다른 방식으로 되었다.



이건 된다는 거다.

그럼 간다.



 석양빛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주황빛 노을이 두 사람을 감싼다.

  





저녁 노을의 따스한 빛깔이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 빛은 그녀가 눈사람인양,

그녀의 다리를 녹이는 것 같았다.

걸을 수 없게끔.



무언가 잘못된 곳에 들어온 것 같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거면 된 거다.


아스파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페리클레스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천천히.




 그는 놀라지만,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앉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석양을 오래 바라봤다. 


INTO THE 6TH 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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