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SE 6 4장
잘 자라야 해. (4)
페리클레스의 방 - 밤 10시
페리클레스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노트북이 켜져 있다.
그는 아스파시아가 보여준 노트를 본다.
"선을 넘어야 효과가 있다"
그는 자신의 최근 영상 스크립트를 연다.
[기존 스크립트]
오늘 하루 많이 버거우셨죠.
사실 그런 날이 더 많아요.
저도 그랬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이게 아스파시아가 말한
뻔한 AI 문장...
왠지 지금 보니까 착한 척 같아.
그럼 어떻게 바꿔야 하지?'
페리클레스는 AI 채팅창을 연다.
[페리클레스 → AI]
"내가 힘들 때 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3가지 알려줘.
사람들이 바로 자극받고 따라할 수 있게."
[AI 응답]
"물론입니다. 힘든 순간을 극복하는
구체적인 방법 3가지를 알려드릴게요:
1. 창문을 열고 깊게 심호흡을 3번 하세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진정 효과가 있습니다)
2. 따뜻한 물을 천천히 한 잔 마십니다.
(탈수를 해소하고 신체 리듬을 정상화합니다)
3. 좋아하는 음악을 5분간 들으세요.
(도파민 분비로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됩니다)
이 세 가지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법이며,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화면을 본다.
'...완벽한데?
근데 뭔가...아스파시아가 보여준 거랑은
느낌이 완전히 다른데?'
그는 아스파시아 노트를 다시 본다.
[아스파시아 버전]
있는 돈 다 털어서 쇼핑을 했어요.
쇼핑한 물건들을 제단에 올리고
감사기도를 올렸어요.
'...이게 차이구나.
AI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누구나 쉽게"
아스파시아는
"돈 다 털어"
"제단에 올리고"
선을 넘었어.
AI는... 안 넘었어.'
페리클레스는 다시 타이핑한다.
[페리클레스 → AI]
"더 자극적으로 써줘.
좀 미친 것처럼.
사람들이
'어? 이건 뭐지?' 하고
멈출 만하게."
[AI 응답]
알겠습니다.
조금 더 자극적이고 강하게 써볼게요.
다만, 안전한 범위 안에서요.
오늘 진짜 힘들었으면 이 3가지를 해보세요.
1. 아무 이유 없이 창문을 확 열어보세요.
숨이 가쁘면 그만큼 버텼다는 뜻이에요.
2. 물 말고, 단맛 나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셔요.
뇌가 ‘아직 살아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에요.
3. 오늘 하루 망친 사람 하나를 떠올렸다가,
‘그래도 나는 아직 남아 있다’고 속으로 말해보세요.
이건 인생을 바꾸는 방법은 아니에요.
다만, 오늘을 통과하게 도와주는 정도예요.
그 정도면 충분할 수도 있어요.
페리클레스는 멈춘다.
'...안 돼.
AI는 선을 안 넘어. 절대로.
안전한 방법
건강한 대처
아스파시아 말대로
쇠사슬에 묶여 있어.'
페리클레스는 직접 써보려고 한다.
"오늘 힘들었죠?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있는 돈을..."
손이 멈춘다.
'..."있는 돈을 다 털어"?
이거... 괜찮은 건가?
사람들이 진짜 돈 다 쓰면 어떡하지?
책임질 수 있나?
너무 위험한 거 아냐?'
그는 지운다. 다시 쓴다.
"그래서 저는
작은 선물 하나를 샀어요."
'...아니야. 이것도 뻔해.'
'작은 선물?
AI랑 다를 게 뭐야.
아스파시아는 "돈 다 털어"라고 했어.
근데 나는...
뭔가 안 나와, 못 쓰겠어.'
그는 화면을 본다.
'혼자서는...
선을 못 넘겠어.
혼자서는...뭔가 달라.'
페리클레스는 폰을 든다.
아스파시아에게 문자를 쓴다.
[페리클레스 → 아스파시아]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집에 와서 혼자 써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ㅠㅠ
AI는 너무 안전하게만 써주고,
저 혼자서는 이 감각이 잘 이해가 안되는데,
혹시 다음주에도 시간 괜찮으세요?
저녁 제가 살게요.
도움이 정말 필요해요."
전송.
아스파시아가 있으면...
내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생각해보면
이거 다 아스파시아가 알려준 건데.
아스파시아 없이는… 못 할지도 몰라.
아스파시아 작업실 - 밤 11시
[알림] 페리클레스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스파시아는 폰을 든다.
메시지를 읽는다.
아스파시아는 미소 짓는다.
'완벽해.
AI는 안전선 안에만 있고,
넌 혼자서는 못 넘고,
나만 넘을 수 있어.
이제 넌 평생 나한테 물어볼 거야.
"이거 넘어도 될까요?"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그 질문마다...내가 답할 거야.'
그녀는 답장을 쓴다.
[아스파시아 → 페리클레스]
"혼자 하려고 하지 마세요.
선을 넘는 건 낯선 게 당연해요.
같이 넘어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쉬세요 :)"
전송.
그녀는 창밖을 본다.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페리클레스를 보지만
실제론 내가 정한 동선을 따라 춤추게 될 거야.
내 스피커. 잘 자라야 해.'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긴장이 풀려서
공기가 달콤해지는 느낌이다.
그녀는 뭔지 모를
그 느낌을 중화하기 위해
피젯 스피너를 돌린다.
회전.
회전.
회전.
멈추고 암전.
페리클레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본다.
'아스파시아...
혼자서는 뭔가 안개 속 같은데
같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진심으로.'
그는 눈을 감는다.
평온한 얼굴.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니
몸의 일부는 살짝 평온을 잃었지만
페리클레스는 모른 척했다.
INTO THE 6TH HOLE